< 한국축구 /차범근, 분데스리가, 한국축구 레전드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국축구 /차범근, 분데스리가, 한국축구 레전드

by goodmi1 2025. 6. 29.

축구경기장

차범근은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유럽 프로리그에서 성공한 선수로, 대한민국 축구의 세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며 한국은 물론 아시아 축구인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였으며, 은퇴 후에도 지도자, 해설위원, 축구 행정가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문에서는 차범근의 성장 과정, 독일 분데스리가에서의 활약, 은퇴 후 한국 축구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차범근의 성장 배경과 축구 선수로서의 성장 과정

차범근은 1953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력을 보였으며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입단하며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는 한국축구협회와 대학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결국 그는 고려대학교에 진학하며 대학 무대에서도 맹활약하며 국가대표팀 발탁의 기회를 얻는다.

1970년대 초반 차범근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특히 1976년 아시안컵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아시아권 최강 공격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의 스피드와 힘, 그리고 특유의 폭발적인 돌파력은 아시아 무대에서는 압도적인 무기였다. 당시 아시아권 선수들이 체력과 기술에서 열세였던 상황에서 차범근은 유럽 선수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체격과 운동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능력은 해외 구단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하며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유럽 빅리그에 진출하는 선수가 되었다. 당시 외국인 쿼터 제한, 언어·문화 장벽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이겨내며 팀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 잡았다. 이 시절 그는 1980년 DFB 포칼컵에서 우승하며 유럽 무대에서 한국 선수의 존재감을 알리는 데 성공하였다.

1983년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이후에도 그는 맹활약을 이어갔다. 레버쿠젠에서도 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1988년 UEFA컵(현 유로파리그)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고, 이는 한국 선수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았다. 그의 분데스리가 통산 98골 기록은 여전히 아시아 선수 최다골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이는 한국 축구사의 영광으로 손꼽힌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의 활약과 한국 축구 위상 제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시절은 아시아 축구선수들의 유럽 진출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유럽 축구계에서는 아시아 선수들의 진출 자체가 드물었으며, 대부분 기술적·체력적 열세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차범근은 예외였다. 그는 독일에서 공격수로서 300경기 가까이 출장하며, 분데스리가 정상급 공격수로 인정받았다.

특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그는 DFB 포칼컵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당시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골잡이로 자리잡았다. 이후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더욱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1987-1988 시즌 UEFA컵에서 결정적인 골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대회에서 그의 득점력과 경기 조율 능력은 유럽 전역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분데스리가 통산 98골 기록은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다. 이는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해외 진출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의 활약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큰 자부심이 되었고, 세계 축구계에서도 'Korean Bomber(한국의 폭격기)'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지도를 높였다.

차범근의 활약으로 인해 이후 박지성, 이영표, 손흥민 등 많은 한국 선수들이 유럽 리그에 진출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는 한국 선수들이 유럽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으며, 이는 한국 축구 유소년 시스템 개선, 해외 스카우터들의 관심 증대로 이어졌다. 또한 분데스리가를 포함한 유럽 클럽들이 한국 시장에 주목하게 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그의 인기는 현지 독일에서도 상당했다.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그의 성실함과 팀 플레이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외국인 선수 중 최고의 모범 사례로 꼽았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 축구의 신뢰도 향상으로 직결되었고, 이후 한국 국가대표팀의 해외 평가전, 유럽 진출 기회 확대 등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은퇴 이후의 행보와 한국 축구에 끼친 영향

현역 은퇴 이후 차범근은 지도자와 축구 행정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대표팀을 지도하며 아시안컵 준우승, 월드컵 본선 진출 등을 이끌었다. 특히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끌며 해외파 선수들의 적극적인 기용을 시도하였다.

비록 월드컵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으나, 그는 당시 대표팀의 유럽식 체력 훈련, 공격 전술 도입 등 현대 축구의 흐름을 한국에 접목시키려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거스 히딩크 감독 체제의 성공에 밑바탕이 되었으며, 한국 축구의 체질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차범근은 K리그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으로 재임하며 K리그 우승, FA컵 우승 등 국내 대회 정상에 올랐다. 그는 팀 운영과 육성에서 체계적인 시스템 도입을 강조하며 K리그 클럽 운영의 선진화를 주도했다. 특히 외국인 선수 영입, 해외 전지훈련, 체계적인 피지컬 트레이닝 도입 등 현대 축구 흐름에 맞춘 팀 운영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방송 해설위원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축구 대중화에 힘썼다. 차범근의 해설은 정확한 경기 분석과 축구 철학을 담고 있어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그는 축구 재단을 설립해 유소년 축구 육성, 저소득층 어린이 지원 등 사회공헌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차범근은 축구인으로서 뿐 아니라 사회 지도자로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도 그의 경력을 인정하여 각종 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국 축구의 국제 발언권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활약은 한국 축구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결론: 한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의 의미와 유산

차범근은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는 유럽 무대에서 아시아 선수로서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분데스리가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그는 국가대표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해설위원과 사회공헌가로서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존재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 대한민국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한국 축구의 국제화, 유소년 시스템 강화, 지도자 교육, 클럽 운영 개선 등 여러 측면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업적과 정신은 앞으로도 한국 축구의 발전과 세계화를 이끄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결국 차범근은 한국 축구사의 산 역사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후배 선수들과 축구팬들에게 끝없는 영감을 제공하며, 한국 스포츠문화 발전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앞으로도 그의 유산은 한국 축구계에서 빛을 발할 것이며, 세계 축구사에서도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