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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와 한글 /우리말지킴이, 민족교육, 식민저항

by goodmi1 2025. 6. 7.

한글

최현배는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한 대표적 국어학자이자 민족 교육자입니다. 조선어학회 활동, 우리말 큰사전 편찬 시도, 일제의 언어말살정책에 대한 저항 등 그의 삶은 한글을 통한 민족 정체성 회복의 역사였습니다. 본 글에서는 최현배의 생애, 한글운동의 전개, 그리고 교육과 실천에서 나타난 민족정신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1. 최현배의 생애와 조선어학회 활동

최현배(1894~1970)는 일제강점기의 언어학자, 교육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글의 정립과 보급, 그리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민족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언어와 교육에 대한 관심이 깊었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제국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유학 중에도 민족 정체성과 언어 주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우며 귀국 후 교육과 학술 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이 시기 조선 사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언어와 문화의 동화 정책에 시달리고 있었고, 한글 교육과 우리말 사용은 점차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최현배는 조선어 연구와 보급, 표기법 정비, 사전 편찬 등을 통해 우리말을 보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1931년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학문 활동과 실천 운동을 병행하게 됩니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감시 아래에서도 국어 정립과 연구를 지속했던 대표적인 민간 학술 단체로, 최현배는 이곳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외래어 표기법' 정리 등 수많은 표준화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그는 우리말의 과학성과 독창성을 강조하며 한글이 단지 민족 문자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체계적 문자임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려 했습니다.

그는 “말이 죽으면 나라도 죽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이를 학생들에게 설파하며 교육현장에서 한글 보급과 의식 고취에 힘썼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쓰는 것은 단지 언어 습득이 아닌,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행동’이자 ‘저항’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언어학은 단지 학문이 아니라 민족 해방의 수단이자 실천적 운동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조선어학회 활동은 단순한 연구가 아닌,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는 조직적 투쟁이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우리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하며, 한 단어라도 더 기록해 후세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최현배는 그 중심에서 집필, 교육, 조직 운영, 기금 조성 등 모든 방면에 참여하며 민족어 생존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의 활동은 이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이어져 고초를 겪었지만, 우리말 지킴이로서의 사명은 끝까지 지켜졌습니다.

2. 한글 교육과 우리말 큰사전 편찬 운동

최현배의 한글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성과 중 하나는 우리말 큰사전 편찬 사업입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사전 제작을 넘어, 민족의 언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거대한 문화운동이자 저항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어학회에서 정세문, 이극로, 김윤경 등과 함께 방대한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주도하였으며, 각지의 교사와 청년 지식인들과 협력해 자료를 모았습니다.

사전 편찬 사업은 일제강점기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든 작업이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일제는 한글 신문, 잡지, 교과서 사용을 단계적으로 금지하고 일본어 상용화를 강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전 편찬 활동은 명백한 불법이자 체포 사유였습니다. 그럼에도 최현배는 “단어는 민족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라며 한 단어라도 더 기록하려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출판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한글 보급을 위해 그는 ‘조선어 문법’(1937), ‘우리말본’(1949) 등 주요 저서를 통해 체계적 교육 내용을 정리하였고, 교육기관 및 야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우리말 사용의 중요성을 설파했습니다. 특히 일제가 일본어 교육을 강요하던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조선어를 가르쳤고,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한글 전용 정책과 국어 교육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의 최현배는 ‘교육운동가’이자 ‘언어운동가’로서 활동하며, 언어를 통한 민족의식 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짊어졌습니다. 그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문자와 교육은 단순한 학습이 아닌, 정체성과 저항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이 같은 인식은 당시 많은 청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언어학도와 교육자들이 탄생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전 편찬 운동은 1942년 일제에 의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탄압을 받으며 중단됩니다. 최현배를 비롯한 33명의 언어학자와 실무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일부는 순국하거나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은 자료는 해방 후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재정비되어, 1957년 ‘큰사전’의 초판이 완성되는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최현배가 평생을 바쳐 지킨 언어 주권의 상징적인 결실이었습니다.

3. 언어 말살 정책과 민족 저항의 상징

일제강점기의 언어 말살 정책은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핵심 수단이었습니다. 특히 1938년 이후 조선어 교육 금지,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등은 민족 동화를 강제로 추진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말은 학교, 공공기관, 법정에서 사용이 금지되었고, 국문 문서나 출판물도 철저히 통제되었습니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 최현배의 활동은 단순한 학문적 시도를 넘은 체제에 대한 실질적 저항이었습니다.

최현배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언어를 빼앗기면 영혼마저 죽는다”고 말하며, 한글을 지키는 것이 곧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강의실에서, 교실에서, 강연장에서 끊임없이 우리말의 과학성과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했으며,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는 1940년대 초반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한글은 조선인의 말과 글이자 정신이다”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석방 이후에도 교육과 학술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그의 저항은 무력이나 정치가 아닌 ‘언어’라는 비폭력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역사적 상징성을 갖습니다.

해방 이후 최현배는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국어 교육 정책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한글 전용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한자 병용 반대, 한글 맞춤법 정비, 국어교육과정 개편 등 수많은 실천적 정책 제안을 통해 우리말 중심 사회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또한 국립국어연구소 설립의 기초가 된 국어학회 활동에도 중심인물로 참여하며, 후학 양성과 연구 기반 구축에 기여했습니다.

이처럼 최현배는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민족 언어를 지킨 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말과 글을 통한 민족 독립의 길을 연 저항가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우리말이 단지 ‘언어’가 아닌 ‘운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결론: 말과 글을 지켜 민족을 살린 이

최현배 선생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 속에서도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낸 언어투사였습니다. 그는 한글이 단지 민족 문자가 아닌, 민족의 정신 그 자체임을 믿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학문과 실천, 교육과 운동을 병행한 전인적인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의 삶은 말과 글을 통한 저항의 역사였으며, 학자로서의 치열한 사명감과 교육자로서의 사랑, 독립운동가로서의 용기가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자유롭게 한글을 쓰고 말할 수 있는 이유에는 최현배와 같은 수많은 이들의 헌신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전 편찬 정신, 한글 전용 운동, 국어 교육 개혁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닌, 미래의 언어 정체성과 문화 주권을 위한 기반입니다.

말과 글은 민족의 뿌리입니다. 최현배는 바로 그 뿌리를 지켜낸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말의 힘을 기억하고, 한글의 가치를 오늘과 내일에 더 크게 꽃피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