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은 평양기독교계의 대표 인물이자 민족 자립과 교육운동,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로 상징되는 조선 독립운동사의 핵심 지도자입니다. 그는 강력한 도덕성과 철저한 비폭력 노선을 바탕으로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섰고, 기독교와 민족운동을 결합한 독립운동의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본 글에서는 조만식의 생애, 평양기독교 중심의 독립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의의 등을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1. 조만식의 생애와 사상적 기반
조만식(1883~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대표적인 비폭력 민족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평양기독교계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며,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수학했습니다. 이후 평양으로 돌아와 민족 교육과 자치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비폭력 민족주의'와 '기독교적 인도주의'였습니다. 조만식은 무장 독립투쟁보다는 교육, 자조, 윤리적 삶을 통한 민족 자강을 강조했으며, 이는 당시의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과 뚜렷한 차별점을 형성했습니다. 그는 개인의 도덕성과 공동체 윤리를 중시하며, '스스로 사는 민족'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조만식은 특히 '조선 물산장려운동'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유명합니다. 이 운동은 조선인의 소비와 생산을 통해 민족경제의 자립을 도모한 것으로, 경제적 독립이 정치적 독립의 기초라는 그의 철학을 반영합니다. 그는 "우리 것은 우리가 써야 산다"는 구호 아래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물산장려운동을 이끌며, 민족의식 고양과 경제교육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숭실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사로, 장로교회에서는 장로와 청년지도자로 활동하며, 민족운동과 종교운동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의 언행은 언제나 일관됐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도덕적 정당성을 통해 신뢰를 얻었습니다.
조만식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평양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지도했고, 이후에도 조선교육회,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등 다양한 시민 단체 활동을 통해 민중과의 소통을 지속했습니다. 일제는 그의 영향력을 매우 위협적으로 보았고,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민족을 살리는 길은 결국 바른 삶, 바른 신앙, 바른 교육에서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이후 신사참배 반대운동, 해방 직후 정치활동으로 이어지며, 일제강점기 도덕적 중심축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2. 평양기독교 기반의 민족운동 전개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가 강세를 보였던 도시이며, 조만식은 이곳에서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민족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표적 지도자로, 종교와 현실 문제를 분리하지 않고 신앙을 통한 사회변혁을 시도했습니다.
1920~1930년대는 일제의 문화통치와 동화정책이 강화되던 시기였고, 기독교 단체들은 이를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은 그 흐름을 거슬렀습니다. 그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강조하며, 종교인의 윤리적 책임을 민족 앞에 둘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주도한 평양의 YMCA, 조선기독교청년회, 숭실학교 등의 활동은 단지 종교 교육에 그치지 않고 민족 계몽, 청년 교육, 경제 자립 등을 함께 포함한 포괄적 민족운동의 장이었습니다. 조만식은 이곳에서 청년들에게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신앙을 도피처가 아니라 실천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조만식의 리더십은 탁월한 조직력과 대중 연설 능력,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권위에 의존하지 않았고, 언제나 민중 속에서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신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그의 말에 귀 기울였고, 이를 통해 평양은 민족운동의 심장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처럼 조만식이 주도한 평양기독교 기반 민족운동은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시킨 모범 사례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 안의 신앙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전체의 해방을 위한 종교적 실천이었습니다.
3.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민족정신 수호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조선을 일본 제국에 완전히 동화시키기 위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가장 강력한 동화정책인 신사참배 강요를 본격화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천황 숭배와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을 강제하는 것으로, 조선인에게는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직접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조만식은 이러한 흐름에 가장 강력하게 맞섰던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학교, 공공기관, 교회까지 강제 적용되었고, 많은 기독교 교회들이 이를 수용하거나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은 단호하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며, 신앙의 본질에 반하는 행위”라고 규정하며 반대 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는 숭실학교 교장 시절, 교육 현장에서 신사참배를 강제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지침을 거부했고, 결국 학교는 폐교당하게 됩니다.
조만식의 이 같은 행동은 단순히 신앙 수호 차원을 넘어서, 민족적 자존과 문화 정체성을 지키는 상징적 저항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실현했고, 이는 당대 젊은이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당시 많은 지도자들이 침묵하거나 타협하던 상황에서, 그의 태도는 종교인의 양심과 지식인의 도덕성을 동시에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평양노회,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선언을 이끌어냈고, 이에 따라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되었고, 강연 금지와 가택연금 등으로 활동이 제한되었지만,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 같은 저항은 해방 후 한국교회가 일제 협력 문제를 반성하고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조만식은 신사참배가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닌, 조선 민족이 가진 고유한 정신과 정체성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조선은 도덕의 나라이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의 독립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결단은 단지 개인의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만식은 평생을 민족운동에 헌신해온 사람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민족정신과 결합한 고유의 저항철학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신사참배 반대운동이라는 형태로 집약시켰던 것입니다. 이 운동은 조만식 개인의 종교적 순교라기보다, 당시 조선 기독교계 전체의 도덕적 분기점이 되었고, 결국 그의 신념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와 민족운동사의 중요한 기념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결론: 조만식 정신의 현대적 의미
조만식은 기독교 신앙을 민족운동의 핵심 원리로 전환시킨 선각자였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이 단지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과 공동체 윤리를 바탕으로 민족 전체가 새롭게 서는 과정임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비폭력, 자조, 교육, 윤리를 통해 민족의 자강을 꿈꾼 그의 정신은, 단순한 독립운동가의 범주를 넘어선 인류적 가치의 구현이기도 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그 정신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는 정권이나 체제에 굴하지 않고, 오직 양심과 신앙, 민족을 향한 책임감으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조만식은 결국 해방 후에도 정치에 참여해 통일 정부 수립을 모색했으나, 분단의 현실 속에서 그의 이상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조만식의 철학은 유효합니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회, 타협 없는 신념, 신앙과 현실의 결합, 공동체를 위한 지도자의 역할 등은 여전히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조만식은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의 사상을 증명한 사람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지금도 한국 현대사의 양심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