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은 일제강점기 전후 조선 민족의 위기를 직시하고, 언론을 통한 민족 계몽과 독립의식을 고취한 저널리즘 실천가입니다. 황성신문 주필로서 집필한 ‘시일야방성대곡’은 한국 근대 언론사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의 언론 활동은 민중의 눈을 뜨게 한 계몽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그의 생애, 언론 철학, 대표 논설의 역사적 충격, 계몽저널리즘의 확산과 현대적 의의를 조명합니다.
1. 장지연의 생애와 언론 사명의식 형성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대한제국기 황성신문사 사장, 경남일보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조선의 위기 속에서 한문 논설을 통해 민족 자각을 촉구한 대표적 계몽언론인이자 저항 지식인입니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유학을 수학한 그는 한학자로 출발했지만, 개화와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근대 언론 활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는 성리학 기반의 도덕 윤리관을 바탕으로 ‘선비의 펜은 칼보다 날카롭다’는 철학을 실천하며, 민족과 언론을 일체화시키려는 시대정신의 표현자였습니다.
1890년대부터 그는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민중 계몽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이 무렵 교육자 겸 저술가로서의 길도 열게 됩니다. 특히 대한제국 말기 대한협회와 대한자강회 활동에 깊이 참여하며 교육과 언론의 역할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가 ‘황성신문’의 논설주간으로 활동할 때 중심 철학으로 이어집니다.
1905년, 장지연은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언론을 민족 정신의 발신지로 전환하고자 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당시 언론 환경은 일제의 간섭과 통제, 친일 언론의 부상으로 혼탁해지고 있었고, 장지연은 “신문은 민족의 눈과 입”이라 말하며 언론 본연의 비판성과 공공성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사 작성자가 아닌 사상가로서 신문을 바라보았습니다. 신문은 단지 사건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과 존엄성을 지켜내는 무형의 전선이자 교육의 장이라는 인식 아래, 그는 민족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독자들을 일깨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2. ‘시일야방성대곡’과 황성신문의 항일 저널리즘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이라는 역사적 참사 직후, 장지연은 「時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 사설란에 실었습니다. 이 글은 당시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되고, 친일파 대신들이 그 조약에 동조한 현실에 대한 울분을 담은 통렬한 고발이었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단 하루 만에 전국에 퍼졌고, 황성신문의 발행 부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시중에 복사된 필사본이 돌면서 무장투쟁 이상으로 사람들의 분노와 각성을 이끌었습니다. 글의 제목부터 “날은 저물었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은 곧 조선인의 처절한 심경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조약 체결의 불법성과 도덕적 파탄을 고발하면서, “위정자는 민족의 수치이고, 백성은 더는 속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성리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대한제국 관료층의 무기력을 동시에 비판하는 이중구조적 비평을 펼쳤습니다. 이는 단순한 반일 논설을 넘어, 지식인 내부의 자성과 민중의 각성을 동시에 촉구한 명문이었습니다.
이 논설로 인해 장지연은 일제로부터 수차례 조사와 구금을 당했으며, 황성신문은 정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고, 이후에도 ‘언론의 양심은 칼로 자를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정치비평, 교육비판, 종교개혁론까지 다방면의 계몽적 글쓰기를 이어갔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의 가장 큰 의미는 그것이 단지 한 편의 칼럼을 넘어서 민족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무장 항쟁이 실질적 반발이었다면, 장지연의 저널리즘은 ‘사상적 무장’이었습니다. 이 글은 이후 항일사상가들과 독립언론인들에게 사상적 자양분이 되었고, 글로써 저항하는 전통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3. 계몽주의 언론운동과 민족의식 확산
장지연은 ‘한 글자의 힘이 백 병사의 힘보다 크다’는 믿음으로 언론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조직하려 했습니다. 그는 언론을 “강단 없는 학교요, 병기 없는 전장”이라 칭하며, 지면 하나하나에 민족의 자주성과 공동체 의식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저널리즘은 단지 사설에 머물지 않았고, 논설문, 사화, 교양 기사, 역사 교훈 시리즈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었습니다.
1906년 이후 그는 민중 교육과 여성계몽에도 관심을 두며, '대한자강회보' 등에 기고하면서 조선 사회가 변화하려면 농민과 여성, 청년들이 깨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언론 지면을 ‘강의실처럼’ 사용했고, 그가 집필한 시사평론과 교육사설은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쳤습니다.
장지연의 글쓰기에는 일관된 철학이 있었습니다. 첫째, 논리와 문장의 구조가 매우 짜임새 있었고, 둘째, 고사성어와 한시적 수사법을 통해 독자의 감정에 깊이 호소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문장을 잘 쓴 것이 아니라, 당대 독자의 문화 코드와 감수성을 꿰뚫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황성신문 이후에도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에 필명 혹은 실명으로 계속 글을 기고하였으며, 점점 더 정치·사회에 대한 비판 강도를 높여갑니다. 특히 일제의 교육령 개정안에 반대하며 “민족 없는 교육은 국민을 없애는 것”이라 비판한 글은 이후 교육독립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됩니다.
장지연은 ‘언론은 곧 인격’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는 기자나 논설위원이 단순히 정보 중개인이 아니라, 민중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 주는 ‘사상적 해설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언론 윤리의 본질적 기준이 됩니다.
결론: 글로 싸운 계몽운동가, 장지연의 유산
장지연은 펜을 무기로 조선의 의식을 일깨운 계몽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였습니다. 그의 글 한 편은 민족 전체에 파장을 주었고, 그의 사설은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이자, 현대 언론 윤리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시일야방성대곡’은 지금까지도 언론인의 사명과 책임을 상징하는 역사적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글이 권력보다 강하고, 사상이 총보다 오래간다는 진리를 실천으로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언론을 단순한 보도의 장이 아닌, 민족 정신의 발신지로 전환시켰고, 신문을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장’으로 탈바꿈시킨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야 할 가치입니다.
장지연이 남긴 질문은 오늘날 언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펜을 드는가?", "진실을 쓰는 데 필요한 용기는 무엇인가?" 그는 이 질문에 실천으로 답한 선각자였으며, 그의 계몽저널리즘은 대한민국 민주 언론의 정신적 출발점으로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