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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와 YMCA /계몽운동, 민족교육, 독립사상

by goodmi1 2025. 6. 6.

함께하는 단체활동

이상재 선생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개화기 대표적 계몽사상가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로, YMCA 운동을 통해 청년 교육과 민족 자강운동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민권 사상, 종교적 포용정신, 국민 계몽 활동을 아우르며 일제의 문화통치에 맞서 비폭력 저항을 전개한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본 글에서는 그의 생애, YMCA 활동의 의의, 그리고 한국 현대 시민사회의 기틀을 마련한 정신을 조명합니다.

1.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이상재(1850~1927)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격동기를 살아간 대표적인 개화기 지식인이자 민족운동가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유교적 전통 교육을 받았고, 성균관에서 학문을 연마한 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부패한 관료 사회와 조선 후기의 낡은 정치제도에 한계를 느끼고, 점차 개화사상과 근대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초기에는 유교적 이상과 충효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후에는 서구의 시민정신, 종교적 포용주의, 자강론(自强論)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서재필, 윤치호 등과 교류하면서 그는 민권(民權) 사상과 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 사회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무렵 그가 접하게 된 것이 바로 기독교 기반의 근대 시민단체인 YMCA였습니다.

이상재는 평생 유학자적 풍모를 지니면서도, 열린 사고로 다양한 문명과 사상을 포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과 미국 선교사와의 교류를 통해 근대화의 방향성을 민족 자주적 관점에서 고민했으며, 정치적 독립은 물론, 국민의 정신적 독립과 자각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나섰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본격적인 반일 민족운동가로 활동합니다. 이후 1907년 대한자강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출옥 후에는 YMCA 활동에 전념하며 계몽운동을 지속합니다. 이처럼 그의 생애는 조선 후기 유학자로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계몽주의자, 시민운동가, 민족 지도자로 발전해 갔습니다.

2. YMCA 운동과 청년계몽의 실천

이상재 선생의 민족 계몽 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활동은 바로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운동이었습니다. YMCA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교육·체육·사회복지 등 다방면에서 시민의식 향상을 도모한 근대적 시민사회 조직이었습니다. 1903년 서울 YMCA가 창립되자 이상재는 이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고,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상재는 YMCA를 단순한 청년 선교 단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YMCA를 통해 조선 청년들에게 새로운 시대정신, 곧 자주독립과 근대 시민의식을 전파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청년 교육, 체육 장려, 문맹 퇴치, 연설과 토론회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청년 강연회'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공개강좌 형태였으며, 청년들에게 근대 세계의 흐름과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상재는 YMCA 활동을 통해 기존 유교 질서에서 소외되었던 평민, 중인, 신지식인들을 조직화하며 '국민 계몽'이라는 새로운 운동 지형을 개척했습니다. 그는 “국가의 미래는 청년에 달려 있다”라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조선인 스스로 민족의 진로를 선택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같은 교육 중심의 비폭력 저항은 후일 3.1 운동의 지적 기반이 되었고, 시민 저항의 모범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또한 YMCA 내에서는 체육 활동도 적극 장려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체 건강을 넘어서, 청년들에게 공동체 의식, 협동심, 규율을 가르치는 장이었고, 이는 계몽운동의 또 다른 형태였습니다. 이상재는 “강한 체력 위에 강한 정신이 자란다”라고 보며, 체육을 통한 민족 자강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YMCA는 신앙, 교육, 체육, 문화가 융합된 복합적 시민운동의 장이었으며, 이상재는 이 운동의 중심에서 실천적 리더로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YMCA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왕성한 교육운동과 출판활동, 대중계몽에 나섰습니다. YMCA는 일제에 의해 여러 제약을 받았지만, 이상재는 "지금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깨어나게 해야 할 때"라고 강조하며, 끊임없이 청년들에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비폭력·비정치적 계몽운동은 이후 3.1 운동에서 시민 주도의 전국적 독립운동으로 확산되는데 중요한 사상적, 조직적 기반이 됩니다. YMCA는 이상재의 지도 아래 단순한 종교단체를 넘어, 근대 조선의 시민 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 기관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3. 민족운동과 시민사회 형성에 끼친 영향

이상재 선생의 활동은 단순히 YMCA 내에서의 청년 교육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계몽운동과 교육 실천은 민족운동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시민사회 형성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무장투쟁보다 대중의 각성과 조직화가 민족 독립의 핵심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고, 이는 곧 비폭력 시민운동이라는 방식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은 이러한 이상재의 사상과 실천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한국 기독교계와 학생, 시민 단체들을 조율하며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선언서의 정신적 방향을 잡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민족은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싸우는 것이다”라고 설파하며, 시위 현장에서도 철저히 비폭력 원칙을 유지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YMCA의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통해 민중 속으로 확산되었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자치, 자조, 자각의 시민운동으로 꽃 피웠습니다. YMCA 회원들 다수가 후일 항일 언론, 교육운동, 농촌계몽운동, 노동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바로 이상재가 심은 ‘실천적 민족정신’의 결실이었습니다.

이상재는 근대 시민사회 개념이 희박했던 조선에서 ‘공공성’의 가치를 설파한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국가와 정부가 독점하던 권위와 기능을 시민 스스로가 감당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교육과 자치조직, 봉사활동 등을 체계화했습니다. 이는 YMCA뿐만 아니라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청년회, 농민회, 노동자 교육조직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이상재는 정치적 야망이나 권력과는 거리를 두며, 지식인의 역할이란 시대의 눈을 열어주고, 민중과 함께 숨 쉬며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시민교육'이었고, 그의 강연, 글, 활동 하나하나는 당시 억압된 사회에 커다란 울림을 주는 실천이었습니다.

1927년 신간회 결성 당시에도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좌우 연합 민족전선의 형성에도 이념보다 대중의 단결을 중시해야 한다는 일관된 철학을 견지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YMCA와 그가 남긴 정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시민단체 지도자에게 이어졌고,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시민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결론: 계몽에서 민족으로, 시민의 스승 이상재

이상재 선생은 조선의 전통 유학자로 출발했지만, 서구 문명과 기독교 시민운동을 접목하여 조선 사회를 각성시킨 ‘시민의 스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권력을 좇지 않고 사람을 가르쳤으며, 조국을 구하는 길이 곧 국민을 깨우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그의 삶은 철저한 계몽과 실천, 자강과 협동, 비폭력과 연대의 철학으로 일관되었습니다.

YMCA 운동을 통해 그는 조직적 교육과 자치 활동을 실현했고, 이를 통해 민족의 독립정신과 근대 시민사회의 기틀을 동시에 세웠습니다. 무력 대신 사상을, 투쟁 대신 계몽을 선택한 그의 길은 더디지만 견고한 변화의 씨앗이 되어 해방 이후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청년 교육과 사회적 연대는 오늘날까지도 시민운동과 교육철학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정치적 갈등, 세대 간 분열, 사회적 양극화 속에 다시금 ‘시민의 역할’과 ‘공공의 가치’를 묻고 있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남긴 사상과 실천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국가는 깨어 있는 시민의 힘으로 지켜진다”라고.

이상재는 단지 역사 속의 독립운동가가 아닌, 한국 시민사회의 뿌리를 세운 위대한 스승입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앞서 간 길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정신을 계승하고 확장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과제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