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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거 /한인애국단, 도쿄의거, 항일정신

by goodmi1 2025. 5. 30.

수류탄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는 일제의 심장 도쿄 한복판에서 일본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지며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의 의거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첫 작전으로, 단순한 무력 시도가 아닌 세계 여론을 각성시킨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생애와 도쿄 의거의 전개,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와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을 심층적으로 조명합니다.

이봉창 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의 시작

이봉창(李奉昌, 1900~1932)은 황해도 용강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독립운동사를 빛낸 의열투쟁의 대표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 내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고, 청년 시절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사회는 조선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으며, 그가 겪은 차별과 수모는 이봉창의 민족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일본식 이름 ‘야마모토 히데오’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 이름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임을 깨달은 뒤 다시 본명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조선인으로 태어났고, 조선인으로 살며, 조선인으로 죽기를 원했다”라고 기록하며,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비참함을 극복하고자 한 개인적 각성을 보여줍니다.

1931년, 이봉창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촉하게 됩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과 내부 갈등으로 독립운동의 동력이 약화된 상황이었고, 김구는 민족의 사기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합니다. 이 단체는 비밀 독립운동조직으로, 일제의 주요 인물 암살 및 상징적 타격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이봉창은 자원하여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특공대원이 되었고, 일본 천황을 타깃으로 한 의거를 계획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테러행위가 아닌, 세계 만방에 조선 민중이 살아 있고 일제에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김구는 그의 결심을 듣고 “너는 이미 죽음을 이긴 자”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합니다.

이봉창은 이후 폭탄 투척 훈련과 행동 계획을 세밀히 준비하고, 의거 장소인 도쿄에 입성합니다. 당시 그는 일본 정부의 검문을 피해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위장해 도쿄에 입국했으며, 열흘 넘게 일본 황제의 동선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봉창의 철저한 준비와 비장한 각오는 그가 단순한 행동가가 아닌 치밀한 전략가였음을 보여줍니다.

도쿄 의거의 전말과 국제사회 반응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 인근. 신년 군사 열병식을 마친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마차를 타고 귀환하는 순간을 기다리던 이봉창은, 예정된 위치에 서서 자신이 준비한 수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폭탄은 천황의 마차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며 일대에 큰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천황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폭탄의 위력은 컸고 당시 일본 내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은 일본 경찰에 의해 강도 높은 취조를 받았고, 자신이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그는 전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조국의 이름으로 행동했음을 주장하며 오히려 일본 재판정에서 당당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일본은 사건을 축소 보도하며 천황에게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런던타임스, 프랑스 르몽드 등 주요 국제 언론에 실렸고,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일본 천황을 겨냥한 폭탄을 투척”했다는 뉴스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의 아킬레스건을 찔렀습니다. 그동안 조선은 식민지로서 일본에 철저히 종속된 존재로 묘사되어 왔지만, 이 사건은 그 시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는 더 이상 조선 민중이 복종만 하는 존재가 아니며,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독립국가 민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의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당성과 존재감도 강화시켰습니다. 그동안 소수 지식인 중심의 망명정부로만 인식되던 임시정부가 실제로 일본 본토에서 행동을 일으킨 무장 단체로 인식되며, 중국 국민당을 비롯한 아시아 민족주의 세력에게도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0월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꿋꿋하게 감옥에서 독립에 대한 신념을 유지하였으며, 그의 유언은 “내 죽음을 기화로 하여 민족은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였습니다. 이 말은 곧바로 실현되었는데, 그의 순국 후 불과 석 달 만에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가 이어지며,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한인애국단과 독립운동 흐름 속 의거의 역사적 의미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단지 개인의 용기 있는 행동에 그치지 않고, 한인애국단이라는 조직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김구는 오랫동안 고립된 임시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무장투쟁 조직을 구상했고, 그 결과물이 한인애국단이었습니다. 이봉창은 그 첫 번째 주자로서 단순한 투사 이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한인애국단은 이후 윤봉길 의사, 유상근, 이덕주 등으로 이어지는 특공조직으로 발전하였고, ‘상징적 인물 제거를 통한 국제 여론 환기’라는 전략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이봉창 의거 이후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실질적인 독립운동 세력으로 인정하고 지원을 강화했으며, 국내외 한인 사회에서도 임정에 대한 후원이 급증했습니다.

이 의거의 또 다른 핵심 의의는 민중의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데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생계를 위해 억눌린 삶을 살았고, 직접 항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봉창은 목숨을 걸고 천황이라는 상징에 정면 도전함으로써,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민족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그의 행위는 단지 폭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민족의 존엄과 분노, 희망을 실은 항의였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권력의 심장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이봉창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사였지만, 철저한 계획과 명분 아래 행동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이자 전략가였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이봉창의 이름이 반드시 언급되는 이유는, 그의 투쟁이 단지 일제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민족정신의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강한 적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그 정신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결론: 폭탄 하나가 남긴 민족 정신의 횃불

이봉창 의사의 도쿄 의거는 천황을 향한 폭탄 한 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 민족의 분노와 비전을 응축한 정의의 폭탄이었으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물줄기를 다시 움직이게 한 ‘기점’이었습니다.

그의 의거는 당시에는 실패로 평가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이끌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지를 굳히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세계는 이 작은 조선 민족이 거대한 제국주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되었고, 우리는 그의 이름 아래 자주정신, 민족정신, 희생정신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의, 자주의 가치를 말하는 대한민국은 이봉창 같은 이름 없는 영웅들의 피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가 남긴 질문—“조국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시대의 가치로 이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