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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독립신문 /계몽운동, 국민교육, 자유사상

by goodmi1 2025. 5. 31.

신문

서재필은 근대 한국 계몽운동의 선구자로서, 독립신문을 창간해 국민의 눈과 귀를 열고자 했던 언론인이자 사상가입니다. 그는 자유, 평등, 자주라는 가치를 조선에 뿌리내리기 위해 언론과 교육, 정치개혁 운동에 전념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서재필의 생애와 독립신문 창간 과정, 계몽운동의 전개, 그리고 한국 사회에 끼친 깊은 영향을 종합적으로 살펴봅니다.

서재필의 생애와 계몽사상의 형성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를 거쳐 미국에서 생을 마친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이며 실천적 개혁가입니다. 그는 19세기 말 조선 사회의 낡은 체제와 위정척사론에 맞서 근대적 사상과 문명을 도입하려 한 '개화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본래 양반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지만, 구체제의 한계와 국가 위기를 절감하고 젊은 시절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1884)을 기획해 실행에 옮겼습니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고,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생애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미국에서 10여 년을 보내며 영어를 배우고 의학을 공부했고, 1890년에는 미국 최초의 한국계 의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의사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자주 독립과 국민 계몽, 정치 개혁이라는 대의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그의 중심 가치였습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민주주의, 자유언론, 시민참여, 공공교육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하며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게 됩니다. 그가 체험한 미국식 공화정은 권위주의 조선과는 완전히 달랐고, 그는 귀국 후 이를 조선에 적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개혁 인재를 필요로 했고, 서재필은 이 무렵 조선으로 귀국하여 본격적인 계몽운동과 언론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처럼 서재필의 사상은 단순히 개화나 서구 숭배가 아니라, 실질적 국민 자각과 국가 발전을 위한 합리주의적, 실용주의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 '국민의 주권은 언론에서 시작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근대 사회 건설에 헌신하였습니다.

독립신문 창간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서재필의 계몽운동 중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활동은 바로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창간이었습니다. 1896년 4월 7일, 그는 민간 자본과 민간 인력으로 한국 최초의 한글 신문을 발간하게 됩니다. 독립신문은 이전의 관보 중심의 발표식 신문과는 달리, 일반 민중이 쉽게 읽고 접할 수 있도록 한글을 중심으로 작성되었고, 정치, 사회, 국제, 과학, 문예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이름 그대로 ‘국가의 독립’, 나아가 국민의 정신적 독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는 신문 창간사에서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 일을 알아야 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 스스로 이뤄야 한다”고 밝혔으며, 이로써 언론을 통한 계몽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독립신문은 서구의 문명과 정치제도를 소개하면서, 국민이 직접 참여하고 배우는 정치 문화를 도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신문은 1899년까지 총 3년간 700호 이상 발간되었으며, 주 3회에서 주 5회로 발행 빈도를 늘려가며 점차 전국에 확산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이 신문을 읽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선비와 상인, 농민, 여성들까지도 신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읽는 국민’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독립신문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당시 고종과 정부를 비판하고, 민중의 정치 참여를 촉구했으며, 백성의 권리를 언급하는 등 정치적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로 인해 보수적 유생과 수구파의 반발도 심했으며, 심지어 고종조차 독립신문의 영향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정치적 압박 속에서 독립신문은 폐간되고,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이후의 언론, 계몽운동, 시민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민중의 눈을 뜨게 한 신문’, ‘국민을 교육한 언론’으로서 독립신문은 오늘날 한국 언론의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언론사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계몽운동의 실천적 전형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서재필 계몽운동의 역사적 영향과 현대적 의의

서재필이 이끈 계몽운동은 단순히 신문이나 정치 개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의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협회’를 창설하여 집회, 강연, 청년교육, 국민참정권 확대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이는 훗날 애국계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민중이 직접 정치에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특히 만민공동회는 서울에서 1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인 대규모 정치집회로, “민은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구호 아래 정치 개혁, 언론 자유, 국민 참정권, 내각제 도입 등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전례 없는 대중운동이었고, 서재필은 이 집회를 주도하면서 조선 사회에 정치적 자각을 불러일으킨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 개혁운동은 보수파와 궁중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되었습니다.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시민권자로 생을 이어갔으며, 한국 독립운동과도 지속적으로 연결되었으나 국내에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1947년 귀국했으나, 1951년 한국전쟁 중 타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서재필의 사상과 활동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치입니다. 언론의 자유, 국민 교육, 민권 의식은 모두 서재필이 강조한 요소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정신은 언론인, 교육자, 시민운동가, 개혁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실천되고 있으며, 특히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로 남아 있습니다.

결론: 사상의 불씨로 피운 민족의 자각

서재필과 독립신문의 역사는 단지 과거의 개화 운동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근본 구조를 바꾸기 위한 사상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무기를 들지 않았지만, 펜으로, 언론으로, 연설로 민족의 의식을 깨웠습니다. 국민을 ‘지배받는 존재’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국민 의식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서재필이 남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국민은 지금 얼마나 깨어 있는가?”, “언론은 지금 얼마나 자유로운가?”, “국가는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그의 계몽운동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남긴 불씨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살아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언론, 국민을 위한 교육, 책임 있는 참여가 그 불씨를 더욱 크게 만들 것입니다. 서재필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가는 길을 밝히는 ‘생각의 횃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