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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 의열단, 항일투쟁

by goodmi1 2025. 6. 2.

폭탄 수류탄

1926년 12월, 독립운동가 나석주는 조선 경제 침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총독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는 일제 식민정책의 실체를 정면으로 타격한 대표적 의열투쟁으로, 무장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조선 민중의 분노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나석주의 생애, 의거의 전개,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조명합니다.

나석주의 생애와 항일의식의 형성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황해도 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의 주요 단원으로 활동하며 일제 식민 통치의 핵심 기관을 직접 겨냥한 의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개인적 신념과 시대적 사명이 만나 극단적인 행동으로 귀결된, 실천적 민족주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석주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안정된 유년기를 보냈으며, 국내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뒤 상해로 유학해 중국 정치학과 군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였던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신채호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그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 민중의 저항 의지가 본격적으로 불붙었고, 이에 따라 무장 항쟁 노선이 강화되던 시기, 나석주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해 적극적인 행동 노선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군사훈련과 폭탄 제조 교육을 받으며 테러형 독립운동의 실행자로 거듭났으며, ‘목표는 민족을 지배하는 구조 자체’라는 인식 아래 상징적 기관을 파괴 대상으로 설정하게 됩니다.

그의 목표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식민 통치의 중심이며,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인의 토지를 강제로 수탈하고 일본인 지주들에게 이전하는 핵심 기관으로, 조선 민중의 분노가 집중된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나석주는 이 두 기관을 동시에 타격함으로써 민족적 분노와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작전을 위해 수개월간 상해에서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폭탄과 권총을 소지한 채 서울로 잠입합니다. 신분을 위장하고 거처를 옮겨가며 작전 시점을 조율한 그는 결국 1926년 12월 28일,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총독부 의거의 전말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서울 태평로에 위치한 조선총독부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는 오전 일찍 준비한 폭탄과 권총을 소지한 채 동양척식주식회사 본사로 먼저 향했습니다. 당시 이 회사는 일본 제국이 조선인의 토지를 강탈하고 일본인 농민을 이주시켜 식민지 경제를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던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민중의 생활과 생존 기반을 파괴하던 실질적 통치기구였기에, 나석주는 이 회사를 우선 타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회사 내부로 진입하여 폭탄을 투척했지만, 내부에 있었던 주요 인물들은 직접적인 사망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폭탄이 터지면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고 직원 다수가 부상당했습니다. 현장은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일제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주변을 봉쇄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그는 곧장 인근에 위치한 조선총독부로 이동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천황의 명을 받아 조선을 직접 통치하는 기관으로, 행정, 사법, 경찰권을 모두 쥐고 있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나석주는 총독부 정문으로 접근했으나, 이미 경계가 강화되어 접근 자체가 어려웠고, 결국 외곽에서 무장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총격전 끝에 그는 몇 명의 일본 경찰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주하려 했으나, 이미 현장을 포위한 경찰병력에 의해 추격을 당합니다. 그는 체포 직전 마지막 총알로 자결을 시도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며, 일제는 그의 시신을 비공개 처리하고 유족과 지지자들의 추모를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의거 직후, 일본 당국은 이 사건을 ‘광신적 테러’로 규정하고 철저히 통제하려 했지만, 국내외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오히려 나석주의 행동에 주목하며 그의 희생정신과 항일의지를 조명했습니다. 상하이, 베이징, 도쿄 등지의 언론은 그의 행동을 “정의에 기반한 민족의 응징”이라 표현하며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이 의거는 단순한 무력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준비된 정치적 시위였습니다. 나석주는 조선 민중이 일제 식민 경제 구조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핵심 기관에 직접 폭력을 가함으로써 민중의 분노를 표현하고, 식민 체제의 정당성을 흔들고자 했습니다.

나석주의 의거가 끼친 역사적 영향과 평가

나석주의 의거는 단기적으로는 조선총독부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민족주의 운동에 강력한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는 철저한 준비와 명확한 목표의식을 갖고 행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민족정신과 정의감, 희생정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첫째, 그의 의거는 식민통치의 경제 기반을 정면으로 겨냥한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기존의 많은 의열투쟁이 경찰서, 군 시설, 또는 고위 관리들을 타격 대상으로 삼았던 반면, 나석주는 식민경제의 상징이자 조선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본질적 시스템에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둘째, 나석주의 행동은 의열단의 활동 방식과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한 사례로도 중요합니다. 김원봉이 주도한 의열단은 단순한 무장 조직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행동과 사상교육, 조직적 훈련을 통해 운영되었으며, 나석주는 그 이상을 실천한 대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의거는 의열단의 존재 가치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셋째, 이 사건은 1930년대 독립운동의 노선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폭력주의와 외교독립론이 점차 한계를 보이던 시기, 나석주의 의거는 무장 투쟁의 정당성을 부각했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전략 수립 및 광복군 창설 등에도 정신적 자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넷째, 그의 의거는 일제의 폭력적 통치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사상범 특별관리’ 정책을 강화했지만, 오히려 조선 민중의 저항의지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방 이후 나석주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교과서와 독립운동 기념관 등에서 널리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의 유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예우하고 있으며, 매년 추모행사도 열리고 있습니다.

결론: 식민 경제를 향한 정의의 폭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의거는 단지 한 명의 독립운동가가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선 민족이 일제 식민경제 시스템에 대해 품었던 깊은 분노와 저항의지를 집약한 민중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는 폭탄과 총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웠지만, 그 본질은 ‘정의’를 위한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민중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은 식민 경제의 구조를 인식했고, 이를 근본부터 부수지 않고서는 진정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꿰뚫었습니다. 나석주의 행동은 조선 민중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고귀한 투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우리가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정신적 유산입니다.

그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불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한 독립과 정의를 향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나석주는 죽음으로 대답했고,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다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