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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독립운동/항일의식,독립운동,여성계몽

by goodmi1 2025. 6. 9.

 

 

등불

김마리아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과 여성의 권리를 동시에 외친 항일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3·1 운동 중심인물로 참여하고 근우회를 창립하며 여성계몽과 민족운동을 병행한 그녀는, 여성도 독립의 주체임을 실천으로 보여준 선구자였습니다. 본 글에서는 김마리아의 생애, 여성독립운동의 전략, 그리고 현재적 의미를 중심으로 조명합니다.

1. 김마리아의 생애와 항일의식의 형성

김마리아(1892~1944)는 조선 후기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여성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민족과 여성의 해방을 동시에 외친 선구적 계몽운동가였습니다. 평안남도 평양에서 기독교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과 교육의 중요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김 씨 가문은 일제의 감시대상이었으며, 이 환경은 김마리아의 항일의식을 자연스럽게 키웠습니다.

그녀는 선천여학교,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여자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이 시기에 많은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여성 차별의 구조를 동시에 자각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 유학생 조직인 '조선여자유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며 여성도 민족 문제에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철학을 확립하게 됩니다.

이후 김마리아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크랜턴여자대학과 웰슬리대학에서 유학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구 여성운동과 기독교 사회개혁사상을 체계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가 단순한 독립운동가에 그치지 않고, 조선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한 교육자이자 조직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하여 귀국한 김마리아는 전국적인 독립운동 확산을 위한 여성 네트워크 형성에 앞장서게 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은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그녀는 여성도 역사적 책무를 지닌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며 여성조직 결성을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마리아는 일제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해방 전까지도 줄곧 민족과 여성의 해방이라는 두 개의 이상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김마리아의 사상은 전통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독교적 인간존엄 사상, 민족주의, 계몽주의가 어우러진 독특한 항일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교육받은 여성은 민족의 어머니가 아니라 민족의 동지여야 한다’는 명제를 실천으로 보여준 귀중한 사례였습니다.

이처럼 김마리아는 여성에게도 정치적 자각과 행동이 요구된다는 메시지를 20세기 초 조선 사회에 뚜렷하게 각인시켰으며, 그녀의 등장은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기념 인물이 아닌, 민족 독립운동과 여성 해방운동의 실천적 가교 역할을 했던 진정한 여성 독립운동가였습니다.

2. 3·1운동과 여성 중심 독립운동의 실천

1919년 3·1운동은 조선 전역을 뒤흔든 최대 규모의 민족 저항운동이었으며, 김마리아는 이 운동의 기획 단계부터 실질적 실행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 유포, 시위 주도,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들이 부차적 역할에 머물던 관행을 깨고, 독립운동의 주체로 등장한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김마리아는 서울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조직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기독교 여성 연합, 여학교 졸업생 조직, 지방 여성 계몽가들과 연대하여 전국적인 항일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거리로 나서야 했으며, 이는 일제 감시와 검거, 고문이라는 극단적 탄압과 직결된 위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마리아는 “여성도 피 흘릴 각오로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김마리아 자신도 3·1운동 직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폐병과 위장병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은 잠시이고, 독립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기며 투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출옥 후에도 치료 대신 다시 조직 재건에 나서며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복귀한 그녀의 행동은 후배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 김마리아는 여성 중심의 항일운동이 단발적 시위로 끝나지 않도록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려는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국내외 여성 계몽단체와 교류하며 여성 독립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모색했으며,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연결점을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독립운동의 정치적 의미와 여성 참여의 정당성을 동시에 확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김마리아가 전개한 활동은 단순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여성의 자각을 중심에 둔 ‘이중의 해방운동’이었습니다. 남성 중심의 민족운동은 종종 여성의 역할을 보조적, 상징적으로만 인정했지만, 김마리아는 행동과 조직의 중심에 여성을 세웠고, 이를 통해 ‘여성도 독립의 주체’ 임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여성주의 역사관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이처럼 그녀는 3·1운동을 기점으로 ‘여성 독립운동’이라는 별개의 흐름을 만들어냈으며, 이후 근우회 창립으로 이어지는 조직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김마리아는 민족 해방의 길에 여성도 동등하게 나설 수 있다는 인식을 사회에 확산시켰고, 이는 한국 여성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행동, 조직, 사상 모두에서 독립운동의 혁신적 전환을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3. 근우회 창립과 여성계몽운동의 확산

1927년, 김마리아는 한국 여성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조직 중 하나인 ‘근우회’ 창립에 핵심적으로 참여합니다. 근우회는 조선의 독립과 여성의 권리 향상을 동시에 추구한 최초의 대중적 여성 단체로, 여성도 민족운동의 당당한 주체임을 사회적으로 선언한 계기였습니다. 김마리아는 이 조직의 사상적 지주이자 실천적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민족 해방과 직결시켰습니다.

근우회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민족의 독립, 여성의 교육, 계몽, 생활개선’. 김마리아는 이를 ‘이중 투쟁’이라 불렀고, 가부장제 해체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동시에 맞서는 조직적 대응을 강조했습니다. 근우회는 전국 여성 노동자, 농민, 기독교 여성, 교육자 등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며 여성계몽운동의 전국화를 추진했고, 김마리아는 이 모든 계층을 연결하는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성 교육을 여성 독립운동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각 지역 여성학교, 야학, 문맹 퇴치 교실을 지원하며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농촌 여성들을 위한 순회강연을 통해, 독립운동이 도시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리고, 전 민중적 연대로의 전환을 주도했습니다. 김마리아는 "여성의 자각 없는 독립은 완전하지 않다"라고 말하며, 교육 없는 해방은 불완전함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될 때까지 근우회의 운영을 책임졌고, 경찰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여성 조직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후 국내외에서 많은 여성 단체가 등장했지만, 근우회는 김마리아의 정신과 비전이 체계적으로 녹아든 최초의 전국적 여성운동 조직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여성운동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민주화운동 내 여성주의 확산의 역사적 전신으로도 평가됩니다.

결론: 독립과 여성해방을 함께 외친 항일 여성운동가

김마리아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이중 해방’을 외친 실천적 지식인이자 행동가였습니다. 그녀는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함께, 여성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성해방운동을 병행하며 새로운 독립운동의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남성 중심으로 기억되던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김마리아는 여성도 민족의 주체로 싸우고, 교육하고, 조직하며 시대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활동은 단순히 항일의 차원을 넘어 조선 여성의 인권, 교육, 정치적 각성이라는 근본적 사회 변화를 이끈 원동력이었습니다. 특히 3·1 운동과 근우회 활동을 통해 그녀는 한국 여성운동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이는 훗날 여성 해방운동, 민주화운동, 시민운동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김마리아를 여성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억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유산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천’에 있습니다. 그녀는 단지 앞에 나선 지도자가 아니라, 수많은 여성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살아 있는 교육자였습니다. 민족의 독립이 여성의 자각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일찍이 꿰뚫은 그녀의 통찰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입니다.

김마리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도 여성과 민족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자유를 꿈꾸고 있는가?”